선교지

미얀마 | 김영민 이지현 선교사 1월 선교소식

NJBPC 2023. 3. 24. 07:05

“인터벌(interval)”이란 투수가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질 때에 머뭇거리는 시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인터벌 순간이 있습니다. “나와 사망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다윗이 요나단에게 했던 고백입니다. 

이 적막한 따웅지 시골 한 귀퉁이에 몸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매일 내 속의 영과 육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전쟁은 오늘도 치열합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 악한 영들의 공격보다 내 마음과 육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타협과 밀정은 더 치명적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나와 사망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고백하는 그 인터벌 순간에 여지없이 나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은 불의한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이 불의한 세상에 태어나, 불의한 일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나만 왜?” 라고 물어보지만, 우리 인생이 아무리 탁월해도 인생 칠팔십인 우리의 날들은 창조주를 비추는 그림자로 왔다가 돌아갈 뿐입니다. 내 안에 드러나시는 예수님이 내 실상이고, 그 때에 나는 그림자가 아닌 실체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내 안에서 드러나시는 빛이요, 참이요, 본질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드러나시면 나는 빛이고, 그 빛이 사라지면 나는 어두움 자체입니다. 결국 “내 마음의 그릇에 창조주를, 그리고 그분을 어느정도 담아내며 살아가는가?” 가 인생의 본질이자 선교의 본질임을 실감하며 살아갑니다.

선교도, 정치도, 문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세상의 지혜나 사람의 설득력, 그 능력으로 지어진 집들은 지금도 그 뿌린대로 거두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는 이 세상은 자기 마음과 육신이 원하던대로 자아 덩어리라는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상이나 교회나 동일하게 심은 그대로를 거두고 있습니다. 어쩌면 죄가 관영하여 차기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업신여겼던 교회가, 그 심었던 씨앗 그대로 부자지간에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처소들을 통해 나의 마음도 봅니다. 

쏜 살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신자가 명목상 회개를 하고 15년을 더 살 수 있을런지 모르나, 내 죄의 결과는 반드시 내가 심은 그대로,  그것도 내 평생동안 거두어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나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로 겉만 위풍당당한 선교 잎사귀들만 무성한 채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모습, 자기 모양 그대로 거두어 먹도록 내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결산방식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아덴에서의 바울이 아니라, 고린도의 바울 안에서 나타나기를 기뻐하십니다. 깨어진 괴수, 존재 바울로 선교하십니다. 이 세상의 지혜나 자기 설득력이 아닌, 주님 발 앞에 산산히 조각난 바울에게 큰 확신으로 성령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말은 영이기에, 질그릇같은 바울의 마음에 그 분을 채워서 넘치시고, 그 성령님이 내 속에도 넘쳐 흘러야 다시 채워지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그게 전도요, 선교입니다. 존재 바울로 드러나는 선교입니다.

나는 주님이 나타나는 영의 거울과도 같아서 주님이 드러나실 때에 나도 실체가 됩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나는 실상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됨의 믿음으로 보면 내 기도도 주님이 하시고, 내 예배도 주님이 하시고, 내 전도도 주님이 하시고, 내 선교도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주님이 드러나실 때에 나는 내가 됩니다. 

나라는 존재로 내 잔이 넘치게 하시고, 나라는 존재로 복이 되고, 존재 예수님으로 따웅지에 그 복을 비추시는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처럼 존재로 드러나심, 선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인지, 침삼킬 틈조차 나를 붙잡고 놓지 않으시는 주님 앞에 섭니다. 나를 두드리시고, 찾으시고, 나를 구하시는 성령님, 오늘 피었다 질 목숨 하나가 뭐길래, 지금도 내 영과 육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인터벌 순간을 한 순간도 놔버리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그리고 어김없이 나는 일곱번 넘어지고 여덟번 째 일어나는데, 주님은 백번이고, 천번이고 내 안에 나타나십니다. 

날이 갈수록,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마음의 자세를 깨끗케 하시고, 순전케 하시고, 나를 존중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 주님은 따웅지라는 광야로 나를 부르실 뿐 아니라, 불러, 내셨습니다. 애굽에서부터 빼냄을 받고보니, 얼마나 영적 침체에 쩔어서 살아왔던 육신이 더 보입니다. 평생에 그렇게 부르짖던 설교도, 기도도, 신앙도, 얼마나 혼적이고 종교적인 잎사귀들이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성령의 큰 확신과 그 나타나심은 사람의 설득력이나 고함지른다고 되는게 아니라, 깊은 깨어짐 가운데에서부터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입니다. “주님, 저와 사망사이는 한걸음 뿐입니다” 라고 고백되는 그 존재로부터 선교는 되어지고, 말씀은 들려집니다.

애굽에서의 모세가 아닌, 광야에서의 모세로 다시 만나주시는 “주님의 나”를 내가 만납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비추이는 거룩의 빛은, 영적 침체인줄도 모르고 평생을 그 혼에 쩔어 살아온 나를 비추시는 다매섹의 빛이셨습니다. 그 빛은 허공을 치던 기도, 맴도는 육신의 기도, 주님의 음성이 아닌 내 목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던 모습을 보게하셨습니다. 내가 평생에 심었던 내 혼적인 씨앗들은 나로 순례자가 아닌, 로마서 7장과 8장 사이를 들락거리는 피난민같은 존재의 열매를 먹고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혼적인 기도는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었고, 주님의 기도로 둔갑되었습니다. 결국 육이 되어버린 그 침체 가운데 주님이 임하셨고 나를 애굽에서 부르실뿐만 아니라 불러 내셨습니다. 그 마음의 침체에서 뽑으실 뿐 아니라 뽑아 내시고, 요나의 아들이 되기까지 또 빼내시는 주님으로 시시때때로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에 비추시던 천하에 충만하신 빛을 만났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내 마음이었음을 왜 나는 몰랐을까? 산을 옮길만했던 영의 신령한 것들이 이 생의 자랑으로 내 마음에서 부패해버린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거짓되었음을 마음의 비늘을 벗어보니 진짜가 보입니다. 내 평생에 아멘되신 아버지! 나와 하나되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오늘도 내 영과 육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터벌 싸움을 지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골리앗을 향한 인터벌의 틈은 없습니다. 투수가 타자에게 공을 날리는 그 인터벌 순간에도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사로잡아 주께 순종하는 것,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지금도 하고, 지금도 계신 기도입니다.

그 날도, 다윗은 상하번제 기도를 다 드리고나서 궁중을 거닐 때였습니다. 다윗 육신에 욕망이라는 죄가 착상되던 그 인터벌 순간은 단 몇초 사이였습니다. 그 순간 다윗은 심지말아야 할 것은 심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내가 심은 것들은 나 뿐아니라, 내 자녀들의 대까지 흘러들어감을 기억합니다. 그 천하에 다윗도 그 죄값을 다 치루고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나도 심은 그대로 이 땅에서 거둘 것입니다.

한 순간, 하나님을 예배하던 처소가 창기의 집이 되어버렸던 다윗의 마음처럼, 십자군처럼 여리고를 이기고 아이 성을 기세등등 쳐들어갔던 이스라엘처럼, 그 한 순간에 영적인 웬수와 원수가 한 순간에 하나되어 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순종을 따먹던 그 순간, 동산은 숨어야할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계보를 이어 영과 육이 섞여 가인을 낳고, 아합과 이세벨이 섞인 아달랴의 피는 온 나라를  말살시켜버렸습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무서운 육신의 댓가입니다. 무당 굿하듯이 아무리 복음의 부적을 붙여봐야 육에 속한 자녀들이 출생합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흑암이었고, 혼돈이었고, 영적 침체였습니다. 그게 나였습니다. 죄는 순간입니다. 내 육신에게 단 1초의 인터벌을 허용하는 것, 이는 영적침체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터벌 순간이 중요합니다. 인터벌이 없는 상태, 바로 성령충만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말씀을 내 육신을 위해 심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반드시 죽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신학으로 내 육신에게 인터벌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생각이 나로 영적 침체에 빠져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는 선명한 증거이기에 그렇습니다. 확실하게 내 생각보다 내 영은 죄에 더 민감하고, 죄를 더 빨리 알아차립니다.  주님의 은혜를 그저 받을 수 없습니다.

“나와 사망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오늘도 따웅지 시골 한 귀퉁이 마을을 걸으며 나는 주님과 하나가 되고, 주님은 나와 하나가 되십니다. 엘라 골짜기의 시간은 골리앗을 대면할 크로노스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대면할 주님과의 카이로스입니다. 

깨어져버린 바울의 말이 그 말씀과 하나가 된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그 사랑이 오늘도 내 안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유나 소식
전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 사람, 여러 모양으로 매 주 전도를 나갑니다. 하나님은 그유나에 전도의 불을 지체들에게 번져가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 생명의 물줄기는 뻗어 우리를 불러 내셨듯이 주변에 목마른 자들, 아픈 사람들, 비천한 자들을 끊임없이 찾아내시고 불러내십니다. 여러 생필품들, 그리고 그유나가 직접 심고 기른 고구마와 땅콩을 손질하여 주변 분들에게 나누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유나 농장에서 귀한 시간과 정성을 담아 첫 열매로 드려진 작물들이 복음을 위해 주변 현지 교회들을 위해 사용되니 더할 나위없이 감사합니다. 전도를 위해 그유나가 하나되고, 자원하게 하시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순전한 사랑으로 주님의 떡을 떼게하시니 할렐루야!입니다. 아버지와 하나되어 여러 모양, 여러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함께 기도부탁드립니다.

그유나는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구제 기도: 쎗센툰 국립병원 아픈 분들/따웅지 한센병자 구역/쓰레기산 구역/현지 지역교회와의 협력구제들)

그유나는 매일 정오 12시에 아룁니다. 기도부탁드립니다.
월요일/미얀마 기독인 정치 지도자를 위해/내전지역과 피난민들을 위해/감옥에 있는 사람들 위해/ 극빈자들을 위해/

화요일/그유나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그유나 공동체 지체들의 부모님, 이웃, 가족, 형제들, 그리고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위해.

수요일/그유나 주변 동네 네 곳의 복음화 위해/방과후 학교 아이들 위해/주변 마을 (메따웅, 동티옥 공립학교 교장및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위해/주변 마을 지도자들 회심을 위해/그유나 학교, 농장, 식당을 운영하는 지체들 위해

목요일/그유나의 중보기도가 절실한 분들 위해/죽음을 앞 둔 가족들과 남은 가족들을 위해/실패와 절망과 어려움을 지나시는 모든 분들을 위해/

금요일/그유나가 함께하는 현지 지역 교회들을 위해/따웅지와 미얀마 현지 지역 교회들 위해/그유나를 위해 기도하는 미국과 한국 교회들을 위해

토요일&주일/쉬지 않고 영적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될 분들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기도로 맡겨주신 분들을 위해

침례 소식
공동체에서 1년간 훈련받고 자란 청년 두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하나되어 끝까지 착하고 충성된 빛들로 이 땅 가운데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사진
1. 공립학교 봉사
2. 세례식
3. 빠오족 전도